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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5월 - 독립 영웅

일제강점기 때 활동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에서 활동

박재혁

 

5월의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 선생의 옥중 말씀 중에서.
박재혁 의사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무역상회에서 일을 하다가 1917년에 상해에서 무역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만 들으면 박재혁 의사는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았던 것 같은데요. 하지만 선생은 학생 때 친한 친구이자 독립운동의 동반자였던 최전택과 함께 구세단을 조직하여 항일 잡지를 발간하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민을 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홀어머니와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조국 독립을 위한 노력을 잠시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선생은 김원봉을 만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게 되는데요. 당시 선생은 상해로 넘어가 중국 각지와 싱가폴 등지를 순회하며 무역을 하는 상인의 면모를 유지하면서, 가장 적절한 때에 결과를 발현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짜게 됩니다. 그리고 1920년 4월 부산으로 돌아옵니다. 
 
부산에 돌아온 선생은 중국인으로 가장한 뒤 중국 고서상(古書商)으로 행세하여 폭탄을 고서에 숨겼습니다. 당시 부산경찰서장인 하시모토가 고서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고서상으로 가장하여 잠입하고자 했던 것이죠. 선생은 자신에게 진귀한 고서가 있다며 부산경찰서의 서장의 환담을 신청합니다.
그가 신청한 환담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의사는 부산경찰서의 서장과 마주앉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져온 고서보따리를 풀어 탁자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무역을 통해서 습득한 유창한 일본말로 서장에게 민족의 뼈아픈 외침을 전한 뒤, 보따리를 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굉음이 들리면서 서장은 부상을 입게 됩니다. 물론, 직접 보따리를 풀어놓은 의사 또한 중상을 입게 됩니다. 그 뒤로 그는 모진 고문을 감내해야 하는 시간을 겪었고 결국 기소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에서 거사를 거행한 것인지 궁금해지는데요.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에서 의거를 펼친 건 의열단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의열단은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신 것처럼 강도 높은 암살과 파괴 방식으로 의열 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인데요. 의열단은 창단 직후 국내의 주요 일제기관들에 대한 동시 투탄거사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착수하였지만, 폭탄 밀송 및 은닉 사실이 경찰에 탐지되어, 관련자 20명이 체포되어 거사가 좌절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의열단에서는 다수의 단원들이 붙잡힌 것에 대하여 복수한다는 뜻에서 선생의 거사를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죠.

거사 이후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겪은 박재혁의사는 옥고로 인해 폐병까지 걸려 투병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숨을 거두던 마지막 순간까지 왜놈의 손에서 죽어 욕보이지 말고, 내 손으로 죽자라고 생각 하여 단식을 진행했고, 형이 집행되기 전에 순국하였습니다. 지난 5월 12일은 불꽃의 청년 박재혁 의사 순군 93주기로 박재혁의사 동상 앞에서 추모제가 거행되었습니다.
 
박재혁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가 왜 불꽃의 청년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었는데요. 그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겁고 강인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피로 얼룩진 부산경찰서에 민족의 심판을 한 이후 적에게 목숨을 빼앗길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박재혁 의사.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남긴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라는 말에서 박재혁 의사의 강한 조국독립에 대한 의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활동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에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