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내홍

6·10만세운동 계획 및 주도

영웅정보

박내홍
  • 이름

    박내홍

  • 성별

    남성

  • 일생

    1894~1928

소개글
6·10만세운동 계획 및 주도

영웅 연대기

< 민족운동 통합의 선두에서, 별이 된 박내홍 > ○ 박내홍은 1894년, 충남 덕산군(현 예산군 덕산면)에서 박상호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호는 현파, 천도교 교인으로 받은 도호는 혜암이다. 당숙이자 천도교 4대 교주인 박인호의 양자로 입양되어 서울에서 자랐다. ○ 집안의 영향으로 13세 때 천도교에 입교한 그는 정동학교와 보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920년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기도 했다. ○ 1919년 9월 2일, 박내홍은 국내에서 문화계몽운동을 펼치기 위해 천도교 청년들을 규합하여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20년 4월 25일 ‘천도교청년회’로 확대 개편되어 천도교 내 범 청년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결성하였고, 1923년에는 이를 ‘천도교청년당’으로 확대 재결성하면서 당 본부위원과 상무위원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갔다. ○ 1925년에는 천도교 내에서 최린 등 신파 세력이 일제와 타협적 노선을 걸으며 자치론을 주장하며 분열을 일으키자, 박내홍은 이에 반발하여 천도교청년당을 탈퇴하였다.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추구한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타협적 노선을 걷는 권동진 등 구파 세력에 합류하여, 구파의 전위 조직인 ‘천도교청년동맹’의 결성을 준비했다. 이때 규약기초위원과 전형위원으로 선임되어 동맹 결성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 이윽고 1926년 4월 3일 천도교청년동맹이 결성되자, 이튿날 4일 개최된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대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천도교청년동맹은 전국 각지에 지부를 조직하여 타협적 자치운동을 배격하고, 비타협적 범민족운동을 전개하려 한 성격의 단체다. 박내홍은 이 단체의 대표위원으로서 천도교 청년들의 지도급 인사가 되어 그들을 민족운동의 길로 이끌어 나갔다. ○ 이 시기 순종이 승하하자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진영 간의 합작운동이 일어났다. 고려공산청년회와 천도교 구파가 손을 잡고 6.10만세운동을 계획한 것이다. 두 진영 사이에서 연락과 매개 역할을 맡은 인물은 박내홍의 삼종제(三從弟)인 8촌 동생 박내원이다. 그가 1926년 5월, 권오설을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한 직후 권동진·박내홍과 상의하면서 천도교계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내 양 진영의 합작이 추진될 수 있었다. ○ 박내홍은 천도교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운영할 때 박내원과 함께했으며, 박내원 또한 박내홍을 후견인으로 따르며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6.10만세운동 추진 과정에서도 박내홍은 박내원의 배후에서 적극적으로 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자료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행적을 확인하기 어렵다. ○ 그러나 1950년 6월 14일 《조선일보》에 실린 박내원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천도교측에 박내홍씨 등과 운동 내용을 설명한 후 6월 10일 인산 당일에 각도 교도들이 봉기하기로 약속하였다’라고 하여 박내홍이 만세운동에 깊숙이 간여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또한 1926년 6월 19일《시대일보》기사에 「중대사건 관계인물」중 하나로 박내홍의 사진이 게재된 점은, 그가 6.10만세운동의 핵심 인물임을 증명한다. ○ 즉, 박내홍은 격문 인쇄를 주도한 박내원을 도와 전국 각지의 천도교 교구 연락망을 가동하여 운동을 전국적 규모로 확산시키고, 격문을 각지에 배포할 준비를 하며 6.10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이자 천도교 교주인 박인호의 집에 격문에 사용한 도장을 숨긴 점에서도 박내홍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며칠 앞둔 6월 4일, 격고문이 우연히 일제 경찰에 발견되면서 좌우 연합의 만세운동은 난관을 맞았다. 일제 경찰이 권오설과 박내원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였고,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기 때문이다. ○ 이때 박내홍도 체포되었으나, 동지들이 끝까지 비밀을 지켜준 덕분에 일제 경찰은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6월 21일 무사히 석방되었다. ○ 사상과 이념을 넘어 좌우합작으로 추진한 만세운동 계획은 불발되었으나, 학생 중심의 만세운동은 6월 10일 당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세차게 전개되었다. 이 6.10만세운동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의 민족통일전선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실로 1927년 2월 15일, 최초의 민족유일당인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 천도교에서는 권동진이 주요 역할을 한 가운데, 박내홍 역시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규칙심사위원과 상무간사로 선임되어 핵심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27년 12월 10일 신간회 경성지회 제2차 정기대회에서 대표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1928년 2월 예정된 전체대회의 의결권까지 갖게 되었다. 신간회 운영의 미래를 짊어질 큰 축으로 기대받는 인물이 바로 박내홍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그 역량을 본격적으로 펼치기도 전인 1928년 10월 5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회 사무실에서 괴한의 칼부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서을봉이라는 자가 20여 년간 천도교를 신봉하였던 아버지의 비석을 세워달라는 요청이 거부당하자 벌인 일이었다. ○ 독립운동계로서는 신간회를 이끌어갈 큰 인물을 잃는 비통한 순간이었다. 신간회는 천도교청년동맹과 연합장으로 그의 영결식을 엄수하며 슬픔을 나누었다. ○ 박내홍은 비록 짧은 생을 마감하여 별이 되었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천도교계 청년들을 민족운동의 현장으로 이끌며 6.10만세운동을 지원하였고, 신간회 창립이라는 값진 결실로 민족운동의 선두에 선 의미 있는 투쟁이었다. ○ 정부는 박내홍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관련 링크

공훈전자사료관


관련 자료

등록된 관련 자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