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달룡

6·10만세운동 계획 및 주도

영웅정보

강달룡
  • 이름

    강달룡

  • 성별

    남성

  • 일생

    1888~1940

소개글
6·10만세운동 계획 및 주도

영웅 연대기

< 노동자·농민과 함께한 민족협동전선의 지도자, 강달룡 > ○ 강달룡은 1888년 경상남도 진주부 진주면 비봉동(현 진주시 상봉동)에서 태어났다. 강달룡이라는 이름보다 강달영(姜達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황산’이라는 이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도 ‘강달영’으로 칭한다. 8살부터 17살 무렵까지 약 10년간 한학을 배웠고, 이후 경남도립낙육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했다. 그 뒤 대서업(代書業)에 종사하다가 1917년경 결혼했다. ○ 1919년 3월 초,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한 후 독립선언서를 품고 3월 11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 후 함께 상경했던 김재화 등 지역의 지도자들과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3월 16일 비밀리에 격문 1,000여 매를 인쇄하고, 17일 저녁 진주면 대안동의 한 음식점에서 김재화 등 5명과 회합하여 격문을 배포했다. ○ 3월 18일 정오, 마침내 진주면에서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강달영은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던 대안동에서 ‘조선독립선언서’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배포하며 시가행진을 주도했다. 이 만세운동은 3월 21일까지 4일간 지속되면서, 진주 시내 곳곳에서 농민·상인·학생·종교인·기생·걸인 등 남녀노소 각계각층 약 2만 8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경찰과 헌병,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진압했다. 그는 이 시위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위반 혐의로 3년이 확정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되어 1921년 3월 8일 출옥했다. ○ 출옥 후 1921년 4월 23일 ‘진주청년회’에 참여해 상업부 사교(社交)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노동자·농민 단체를 조직하며 본격적인 대중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 1922년 2월 19일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진주노동공제회’로 불린 이 단체는 진주 내 10개 면에 출장소를 두고 8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한 대규모 조직이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1920년 4월 서울에서 조직된 것으로, 공장 직공·정미공·인쇄공·연초공을 비롯해 신문 배달부·인력거꾼·지게꾼 등 각계각층의 노동자가 참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 단체였다. ○ 강달영은 진주노동공제회를 이끌며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1922년 9월, 진주청년회관에서 경남 서부지역 소작인 1천여 명이 참여한 ‘소작노동자대회’를 개최하여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또한 1922년 10월 16일 조직된 ‘조선노동연맹회’에 투신, 1923년 4월 27일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여 노동운동계에서도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 이후 진주는 물론 중앙과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였고, 그 결과 진주노동공제회 대표 자격으로 1924년 4월 17일 ‘조선노농총동맹’ 발기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조직의 중앙위원으로서 서울과 진주를 오가면서도 강달영은 항상 노동자와 농민 등 사회적 약자의 곁에서 그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1923년 3월 11일, 그가 이끌던 진주노동공제회의 영향으로 ‘진주양화직공조합’이 결성되면서 진주 지역 최초의 직공 노조를 탄생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같은 해 5월 13일에는 백정의 해방운동 단체인 ‘형평사’의 창립축하식에 참석하여 600여 명의 대중 앞에서 축하 연설하며 연대를 표명했다. 1924년 11월에는 ‘진주 운수노동조합’의 동맹파업을 지원하여 노동자들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 1924년 10월 23일에는 무산계급의 지식개발과 새로운 사상을 연구하는 동우사 결성을 배후에서 지원했으며, 이 일로 같은 해 11월 1일 진주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 시기 조선일보 진주지국장으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하고 국내외 정세를 파악했다. ○ 한편,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지원하는 공산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늘어나자, 그 역시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공산주의를 수용했다. 1924년 10월 김재봉 등이 주도하는 ‘화요회’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 중앙총국인‘꼬르뷰로’ 국내부 진주 야체이카(세포조직)의 책임자가 되었다. ○ 1925년 4월 17일 서울 황금정 1정목(현 을지로 1가) 아서원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서 진주지역 대의원 자격으로 대표 20명 중 1인으로 이름을 올렸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회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으나 같은 해 11월 신의주에서 공산당원이 친일 변호사를 구타한‘신의주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조사하던 일제 경찰에 의해 조선공산당의 실체가 발각되어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지도부인 김재봉 등 당원 30여 명이 체포되면서 조직은 큰 타격을 입었다. ○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은 1925년 12월 체포 직전, 강달영에 당 후계 조직의 재건을 맡겼다. 이에 따라 강달영은 1926년 3월 11일 서울 경운동 구연흠의 집에서 ‘제2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 책임비서가 된 강달영은 사상과 이념을 떠나 범민족 연합전선을 통한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1926년 3월 10일 권동진의 집에서 천도교 구파 권동진·이종린, 기독교계 박동완, 언론인 안재홍·신석우 등 7명과 만나 비타협적 민족혁명단체를 조직하고자 했다. ○ 그러던 중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서거하자, 5월 들어 권오설·김철수 등과 그의 하숙집에 모여 인산일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이 운동의 실천을 위해‘6.10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책임자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을 선임했다. 권오설은 박내원을 통해 천도교와 연합하여 6.10만세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 하지만 준비 과정에서 만세운동에 사용할 격고문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권오설 등 만세운동 지휘부가 체포되어 애초 계획은 좌절되었다. 일제 경찰은 이 일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연결시켜‘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비화하면서 130여 명의 관련자를 체포하였다. ○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인 강달영에게도 수배령이 내려졌다. 이를 피해 바나나 장수로 위장하여 조직 활동을 지속했으나, 1926년 7월 17일 저녁 무렵 서울 명치정(현 명동) 소재 주식거래소(경성주식현물취인소) 앞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그곳에 운동 자금 270원을 맡겨 둔 사실을 알아낸 일제 경찰이 잠복해 있다가, 바나나 장수가 주식거래소로 들어가는 것을 수상히 여겨 돈을 찾아 나오는 강달영을 덮친 것이었다. ○ 체포 후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암호 해독을 강요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뼈가 돌이 되어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다”라며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심지어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자살까지 시도하면서 끝까지 저항했다.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0년 9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33년 9월 16일 출옥했다. ○ 그는 안타깝게도 고된 감옥 생활로 얻은 후유증인 정신질환을 이겨내지 못하고, 1940년 7월 12일 오전 2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남은 동지들에 의해 간소하게 치러졌다. ○ 강달영은 늘 노동자와 농민 등 대중을 위한 투쟁을 최우선 가치로 두었다. 그의 투쟁은 민족유일당운동의 모태가 된 6.10만세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1920년대 국내 독립운동 전선을 확대하여 민족총력항쟁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 정부는 강달영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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