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룡

항일노동운동 참여

영웅정보

강주룡
  • 이름

    강주룡

  • 성별

    여성

  • 일생

    1901~1932

소개글
항일노동운동 참여

영웅 연대기

< 한국인 노동자의 어려운 현실을 세상에 알리다 > ○ 강주룡은 1901년 평안북도 강계(江界)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14살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서간도로 이주하였고, 20살에 퉁화현(通化縣)에서 15세의 최전빈과 결혼했다. 남편 최전빈은 채찬의 휘하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병사하였다. ○ 이후 강주룡은 노부모, 어린 동생과 함께 평양에 정착하여 생계를 위해 평원고무공장에 취직하여 직공으로 일하였다. 평양은 서울, 부산과 더불어 고무신 제조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평양의 고무공장 공장주들은 고무공업조합과 같은 조직적 움직임을 통해, 원료 구입과 자본 조달의 어려움을 임금 인하로 해결하려 하였다. 공장주들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자 한 것이다. 이에 노동자들은 임금인하와 벌금제도 등을 반대하며 저항하였다. ○ 1931년 5월 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이 임금인하를 발표하자 노동자들은 이에 저항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12일 동안 파업을 지속했지만 공장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5월 28일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은 단식투쟁에 들어가 공장을 사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1시가 되자 공장주는 일본 경찰을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했다. ○ 공장에서 쫓겨난 강주룡은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아침에 사람들이 모이면 평원고무공장주의 횡포를 호소하고 죽기로 결심했다. 궁리 끝에 그녀는 광목 끝에 돌을 매달아 지붕 위에 던진 후 이것을 타고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갔다. 5월 29일 아침이 되자 모란봉 일대를 산보하던 사람들이 을밀대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강주룡을 발견하고 모여들었다. 강주룡은 이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였다. ○ 강주룡을 검거하기 위해 경관 40여 명이 출동하였다. 이들은 구명 도구를 펼쳐 놓은 뒤, 소방수 3명을 을밀대 지붕 위에 올려보냈다. 결국 강주룡은 그물망으로 떨어졌고, 곧바로 평양경찰서에 검속되었다. ○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5월 29일 저녁부터 6월 1일 새벽 2시 검속 기간이 끝나 풀려날 때까지 한 끼도 먹지 않았다. 경찰은 유치장 안에 밥을 놓아두면 먹을 것이라 여겼으나, 강주룡은 임금인하를 취소하지 않으면 먹지 않겠다며 한 끼도 먹지 않고 버텼다. 3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도 공장문 앞에 모여 공장주의 임금인하에 항거하였다. 강주룡은 선교리 공장문 앞으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이에 공장주는 강주룡 등 20여 명을 해고하고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출근하지 않으면 해고된다는 통지서를 발송하였다. ○ 강주룡은 1931년 6월 9일 다시 검거되었다. 193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적색노조’즉 혁명적 노동조합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은 ‘평양적색노조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강주룡 등 8인에게 7월 3일 예심을 청구했다. ○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감옥에서 투쟁을 벌이던 강주룡은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으로 1년이 지난 1932년 6월 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운 강주룡은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두 달 후인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31세의 꽃다운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틀 뒤, 동지 백여 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서장대 묘지에 안장하였다. 강주룡의 삶은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한국인 노동자가 처한 현실과, 그를 개선하고자 했던 항일노동운동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 정부는 강주룡에게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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