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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홍
이름
이규홍
성별
남성
일생
1877~1928
ㅇ 이규홍의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으로의 계승 이규홍(李圭弘, 1877∼1928)은 전라도 익산 출신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오(元五), 호는 오하(梧下)이다. 1877년 6월 8일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중추원 의관을 지낸 이기영(李琪榮)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히며 성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체결에 분노하였고, 민영환의 순국 소식을 듣고 의병 결성을 준비하였다. 1906년 6월에 의병 수십 명을 모집하여 전주로 떠났지만, 순창에서 의병이 패배하고 태인에서 거병한 최익현도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해산시켰다. 이후 1907년에 박이환(朴?桓)과 문형모(文亨謨) 등과 함께 의병 약 200명을 조직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고산, 진안, 장수, 용담 등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고산 가금리 전투와 진산·금산 일대 전투 등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압박이 심해지고, 의병의 전력도 약화되어 1908년 4월 부대를 해산하고 은신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활동을 재개한 것은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직후인 1912년에 임병찬이 주도한 독립의군부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1914년경 조직이 와해되면서 독립의군부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 1918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0년에는 김좌진이 추진한 군관학교 설립에 3,000원을 제공하는 등 독립군 양성에도 힘을 보탰다. 1920년대 초에는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와 고문을 겪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의병 활동의 경과를 기록한 『오하일기(梧下日記)』를 남겨 당시 무장 독립운동의 실상을 전하였다. 이규홍의 활동은 의병운동에서 독립의군부 참여, 임시정부 지원, 군자금 모집에 이르기까지 무장 독립운동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이어간 사례로 평가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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