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숙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

영웅정보

이은숙
  • 이름

    이은숙

  • 성별

    여성

  • 일생

    1889 ~1979

소개글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

영웅 연대기

이은숙(李恩淑, 1889~1979)은 1889년 아버지 이덕규(李悳珪)와 어머니 남양홍씨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한글과 천자문, 소학언해 등 한문을 읽고 쓰는 능력을 두루 갖추었다. 20세인 1908년 10월 상동교회 예배당에서 이회영(李會榮, 1867~1932)과 혼인하였다. 이후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남편 이회영이 지어준 영구(榮求)라는 이명이 있다. 1910년 12월 일가 60여 명이 서간도로 망명하자, 이은숙도 10개월 된 딸을 안고 함께 만주로 떠났다. 이후 일가족과 함께 만주 류허헌(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일조하였다. 1917년 6월 아들 이규학(李圭鶴)의 혼사로 귀국하였다. 1912년부터 이미 국내에 있던 이회영이 1919년 베이징으로 가자, 이은숙도 2월 베이징으로 이동하였다. 임신한 몸으로 남매를 돌보며, 독립운동가를 보필하는 삶이 계속되었다. 1년에 수십여 차례 거처를 옮겨 다닌 적도 있었다. 1925년에는 손녀 둘과 세 살 아들을 병으로 잃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결국 이은숙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생활비 마련을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에 귀국해서도 그의 독립운동 자금지원은 계속되었다.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자금을 이회영에게 보내기도 했다. 1926년에는 자금 마련 일이 경찰에 탐지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28년부터 경성부 병목정(竝木町)에 있는 고무공장(경성직뉴공장)에서 일하였다. 퇴근 후에는 바느질로 장충동 일대 기생의 옷을 만들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아껴 베이징으로 보냈다. 1930년 들어 경찰의 단속으로 바느질마저 여의치 않자, 남의 집의 가사를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1932년 10월 남편 이회영이 세상을 떠났으며, 1935년 봄 아들 이규창이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갇힌 아들 뒷바라지를 하던 이은숙은 1940년 10월 딸 이규숙 내외가 있는 신경으로 옮겨갔다. 하숙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은숙은 이곳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뒤에도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 고달팠던 삶을 『서간도시종기』에 담았다. 1966년 3월 탈고한 『서간도시종기』는 약 10년이 지난 1975년 1월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로 출간되었다. 1979년 12월 서울 정릉에 있는 아들 이규창의 집에서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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