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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명
이름
임수명
성별
여성
일생
1894 ~1924
임수명(任壽命, 1894~1924)은 1894년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고향은 개성으로 추정된다. 14세 무렵 보통학교를 마치고 집안일을 도왔다. 16세 때 양친을 여의고, 18세인 1912년 서울 모(某)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이 무렵 신팔균(申八均, 1882~1924)을 만났다. 당시 신팔균은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 활동을 하고 있었다. 대동청년당은 1909년 조직된 비밀결사이다. 안희제(安熙濟)·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 등 80여 명의 애국청년들과 함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두 사람의 결혼 시점은 1914년 5월 10일로 기록되어 있다. 결혼 후 신팔균은 만주로 떠났다. 임수명은 개성에 머물며, 남편의 동지인 신백우(申伯雨) ․ 서세충(徐世忠) ․ 엄익래(嚴翼來) 등에게 서신과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1년 무렵 신팔균이 일본 군용 지도를 입수하기 위해 잠시 국내에 들어왔다. 남편이 떠날 때 임수명도 함께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 기록마다 서로 달라서 정확한 망명 시기는 확정하기 어렵다. 망명 후 임수명은 베이징과 만주를 오가는 힘든 삶을 이어가며, 남편의 독립운동을 내조하였다. 그런데 1924년 7월 2일, 신팔균이 만주 싱징현(興京縣) 왕친먼(旺淸門) 이도구(二道溝)의 산악지대에서 중국 마적과 교전 중 순국하고 말았다. 김좌진(金佐鎭) ․ 홍범도(洪範圖) ․ 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를 무대로 무장투쟁을 이어가던 신팔균의 죽음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임수명은 뱃속에 유복자를 임신한 상태였다. 임수명은 남편의 전사 사실을 알지 못한 채 8월 만삭의 몸으로 귀국하였다. 주변에서 충격으로 인한 낙태를 염려하여 귀국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귀국 후 임수명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유복녀를 낳았다. 신팔균과 임수명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이다. 위로 네 아들이 있었다. 장남 신현충은 청주김씨와 신팔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귀국 후 힘겹게 살아가던 임수명은 10월 하순에 이르러 남편의 전사 소식을 확인하였다. 병 중이었던 셋째 아들마저 사망하자, 임수명은 갓난아기를 데리고 음독 자결하였다. 『조선일보』는 임수명의 귀국 과정과 자결 동기를 상세히 보도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