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낙원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

영웅 연대기

곽낙원(1859~1939)은 곽창훈의 딸로 태어났다. 14세 때 해주 백운방 텃골에 살던 김순영(金淳永)과 결혼하였다. 17세에 이르러 아들 김구(金九, 1876~1949)를 낳았다. 20세의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 김구의 항일투쟁 여정은 곽낙원에게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1896년 3월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처단한 일로 투옥되면서 2년여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11년 또다시‘안악사건’으로 투옥되어, 1915년 8월 가출옥 때까지 옥바라지를 지속하였다. 이후 1919년 3월 아들 김구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곽낙원도 1922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도 고단한 여정은 계속되었다. 1924년 1월 며느리 최준례(崔遵禮)가 사망하면서, 어린 두 손자를 도맡아야 했다. 임시정부의 형편상 아들 김구에게 의탁할 수 없었던 처지라, 결국 1925년 11월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에도 손자들을 키우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생활도 어려웠지만, 끊임없는 감시가 그를 괴롭혔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후에는 감시가 한층 심해져, 1934년 4월 손자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향했다. 자싱(嘉興)에 피신해 있던 아들 김구를 만났지만, 함께 지낼 형편은 아니었다. 이후 줄곧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일본군을 피해 피난을 거듭했다. 난징(南京)에서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를 거쳐 1939년 4월 다시 충칭(重慶)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때 인후염에 걸린 곽낙원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81세였다. 곽낙원은 임시정부에서 든든한 조력자로써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함께 생활했던 정정화(鄭靖和)는 “그분이 우리 가운데 말없이 앉아 계신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정신적으로도 우리의 큰 기둥이 되기에 충분하였다”라고 회고하였다. 또한 “매섭고, 대범하고, 절제되고, 소박한 어른으로 존경과 공경을 받았다”는 회고도 보인다. 평소 절약을 권면하였고, 돈이 생기면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사후 충칭의 화상산(和尙山)에 안장되었다가, 1948년 국내로 이장되었으며, 현재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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