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경

독일 유학생 독립운동

영웅정보

이의경
  • 이름

    이의경

  • 성별

    남성

  • 일생

    1899 ~1950

소개글
독일 유학생 독립운동

영웅 연대기

이의경(李儀景, 1899~1950)은 이미륵(李彌勒, Mirok Li)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재독 작가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1남 3녀 가운데 1남으로 출생했다. 이의경은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옛 풍습에 따라 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편집부장으로 외교시보 발행 및 전단을 인쇄·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만세시위를 위해 작성된 <국치기념경고문> 300매를 인쇄하여 배포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제에 수배되면서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이름을 ‘Yiking Li’라고 중국식으로 고친 후 상하이에서 중국 여권을 소지하고 1920년 프랑스 마르세유로 가는 배를 탔다. 이의경은 마르세유에서 안봉근과 안중근의 종부성사를 집전했던 빌렘 신부의 도움을 받아 독일의 뷔르츠부르크(Würzburg)로 간 후 다시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으로 가서 베네딕트회 수도원에 머물렀다. 이후 그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고,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1928년에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뮌헨대학 재학 당시 이의경은 베를린대학의 이극로·황우일, 파리대학의 김법린 등과 함께 1927년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벨기에 브뤼셀의 에그몽 궁(Palais d’Egmont)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결의대회’에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했다. 이들은 대회에 첫째, 시모노세키조약을 실행해 한국의 독립을 확보할 것. 둘째, 한국 내 총독 정치를 즉시 철폐할 것. 셋째,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의경은 「한국의 문제(The Korean Problem)」라는 소책자의 초안을 작성하고, 완성된 결의문을 독일어, 불어, 영어로 번역하여 한국이 처한 상황과 독립의 의지를 알렸다. 이들의 노력으로 2월 14일에 발표된 대회의 최종 결의안에 한국대표단의 결의문도 채택되어 포함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8년 졸업 후 이의경은 잡지투고, 기고 및 번역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이때 집필한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는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한 역작으로 1946년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독일 언론은 올해 독일어로 쓰여진 가장 훌륭한 책으로 이미륵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의 작품은 독일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였다. 한국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죽음」이란 책을 통해 잘 알려진 독일의 저항단체 '백장미단'에 연루되어 사형을 받은 쿠르트 후버(Kurt Huber, 1893-1943) 교수는 이미륵의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1943년 후버 교수가 교수형을 당하자 이미륵은 후버 교수의 가족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등 의리를 지켰다. 훗날 후버 가족들은 동양인 이미륵을 "진정한 친구이자 의리 있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1948년부터는 뮌헨대학의 동양학부에서 한국학과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길을 걷던 이의경은 한국전쟁을 앞둔 1950년 3월 20일 위암으로 타계했다. 그는 그래펠핑(Gräfelfing)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독일인들은 그를 진정한 휴머니스트이자 '완전한 인간'으로 기억했다. 이미륵의 인품에 매료되어 의학에서 동양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훗날 뮌헨대학 동양학부 교수가 된 그의 제자 볼프강 바우어(Wolfgang Leander Bauer)는 “자기를 본보기로 삶의 가장 고귀한 가치를 입증한 한 인간이자 작가”라고 존경하는 마음을 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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