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남

독일 유학생 독립운동

영웅정보

황진남
  • 이름

    황진남

  • 성별

    남성

  • 일생

    (1897) ~1970

소개글
독일 유학생 독립운동

영웅 연대기

황진남(黃鎭南, 1897~1970)은 함흥 출생으로 1905년 무렵 아버지 황명선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했다. 1910년 9월 한인학교 졸업식 당시 황진남은 연단에 올라 ‘대한국의 청년’이라는 주제로, “국가적·신앙적·윤리적으로 완전한 교육을 받을 때에, 우리가 능히 우리 대한국의 바라고 바라는 독립을 지금부터 10년 안에 건설할 줄 믿는다.”라고 연설하여 박수를 받았다. 이후 호놀룰루 마노아벨리에 있는 중앙태평양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7월 졸업했다. 1916년 황진남은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캘리포니아대학 광물학과에 입학했다. 1917년 3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중앙총회에 신입회원으로 가입했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개소한 한인학생양성소에 입소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접한 황진남은 캘리포니아대학을 자퇴한 후 캘리포니아주 각처에 다니며 독립운동을 위한 유세를 펼쳤다. 1919년 3월 15일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전체대표회를 열고 안창호를 재미한인의 대표로 선출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황진남과 정인과를 통신원으로 임명하고 안창호를 수행하여 상하이에 파견하였다. 1919년 5월 상하이에 도착한 안창호는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선임되었고 황진남과 정인과는 미국령 대의사로 선출되었다. 황진남은 안창호의 비서로서 그를 도왔으며 영문에 능숙하여 중국 현지 영자신문 등에 일제의 조선통치 실상을 알리는 영자 선전문을 작성하였다. 다음해 3월 상하이 지역 신문에 3·1운동과 임시정부의 활동을 폄훼하는 기사가 나돌자 『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 영문판 3월 16일자에 조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리는 반박기사를 자신의 명의로 실었다. 1920년 6월 미국의원단이 아시아 각국을 순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황진남은 미국의원단을 상대로 독립을 요청하기 위해 안창호를 수행하여 필리핀으로 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여권이 마련되지 못하여 안타깝게 회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진남은 8월 16일 여운형과 함께 미국 하원의원 쵸스타를 방문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 실상을 설명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등 제반 문서를 제공하였다. 8월 17~20일에는 스몰, 캠프, 하디 하원의원 등을 만나 조선 독립을 적극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황진남은 9월 29일 임시정부 외무부 참사(參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1921년 2월 17일 황진남은 임병직과 함께 프랑스 선박 아토란츠크호를 타고 상하이를 출발하여 3월 28일 프랑스의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하였다. 도착 즉시 그는 파리위원부에 방문한 후 5월 18일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에서는 무고한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동양미술을 전공한 부르크하르트 박사가 『보시쉐 자이퉁(Vossiche Zeitung)』 1923년 10월 9일자에, 「한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관동대지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바를 게재하였다. 이 기사를 본 재독 한인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10월 12일 「한인학살」과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전단을 제작하여 유럽과 미주 상하이 임시정부 등지에 배포하였다. 재독 한인들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항일의지를 대외에 알렸다. 이때 유덕고려학우회의 황진남과 고일청은 10월 18일 부르크하르트 박사를 찾아가 면담하며 진상을 파악하였다. 10월 26일에는 재독한인들에 의해 ‘독일에 있는 한인들의 위대한 회의(Great Meeting of Koreans in Germany)’라는 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일제의 만행으로 당한 한인들의 억울한 죽음과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규탄하였다. 유덕고려학우회는 「한국에서 일본의 유혈통치(Japanische Blutherrschaftin Korea)」라는 독문 전단지 5천부와 「Japan`s Bloody Rule in Korea」라는 영문 전단지 2천부를 작성하여 해외 한인사회와 각국 정부 및 기관에 배포하였다. 재독한인대회에서 배포한 선전문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도가 크게 그려져 있고 황진남·고일청·김준연의 서명이 적혀있다.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소르본느 대학에 입학하여 수리학(數理學)을 전공하였다. 파리 유학 시절 그는 ‘시몬 흥’이라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2차 대전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부인과 함께 1938년 9월 귀국하여 고향인 함흥에서 살았다. 1944년에는 신설된 함흥의학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이 되자 황진남은 서울로 이주하여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동맹에 가입하고 비서로서 보좌하였다. 그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서 외무국방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1948년 3월 18일 입법의원직을 사임 후 정치 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황진남은 이후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번역과 통역 일을 맡아보았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육군성 소속으로 일본 도쿄로 가서 일하다 1970년 5월 13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관련 링크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