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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독립운동가 2018.04.05 조회 18129 0

52_74세_의병장_최익현 

 

최익현

 

세상 모든 권력으로부터 백성과 나라를 구하다 

74세 의병장, 면암 최익현

 

새로운 나라, 조선의 궁궐이었던 경복궁. 하지만,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경복궁은 오랜세원 빈 터로만 남아있었습니다.

약 270여년에 이르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어떤 임금도 경복궁 재건에 감히 손대지 못했습니다.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는 인식과 함께 재건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죠.

 

그 후 1868년, 한 선비가 경복궁 재건에 반대하다 파직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복궁 재건은 민생을 파탄에 빠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반대를 한 거였죠.

시간이 흘러 복직을 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섭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결국, 그는 귀양을 떠나게 됩니다.

 

숱한 파직과 귀양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나아간 이 선비의 이름은 면암 최익현.

그는 1833년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을 널리 알렸고, 23세의 나이에 급제하여 사간원, 이조정랑 등의 관직을 거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에는 민씨 정권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또다시 귀양길에 오릅니다. 복직 후에는, 단발령에 반대하며 위정척사 운동을 계속 이어나갑니다.

최익현의 말과 행동은 단순히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청토오적소'와 '창의토적소'를 올려 불법 조약의 무효화와 의병전쟁을 주장합니다.

 

또한8도 사민에게 포고문을 발표하여 항일 투쟁을 호소하고, 신문을 통해 납세 거부, 철도 이용 거부, 일제 상품 불매 운동 등에 나섭니다.

 

이는 경제적 자립을 통해 민족경제를 살리고자 했던, 그의 신념이 담긴 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최익현은 유학자 민종식이 구성한 의병과 연대하여 직접 항일 의병투쟁에 나섭니다. 임병찬과 함께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세우고, 전북 정읍에서 의병을 일으킵니다.

 

그가 의병장으로 활동하게 된 나이는 무려 74세. 이후 그는 의병의 세력을 키워나가다, 대한제국의 진위대와 대치하게 됩니다. 최익현은 일본군이 아닌 대한제국 군대와의 싸움은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일제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진위대에게 체포되어, 일본군 사령부에 감금당합니다.

 

이후 대마도로 압송당한 최익현은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단식에 돌입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최익현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고 했으나,

 최익현은 음식을 모두 뱉어내거나, 입을 열지 않고 저항하였고 1907년 1월, 단식 끝에 순국하고 맙니다.

 

그는 죽음 직전, 임병찬에게 자신의 뜻이 담긴 유언을 남겼습니다. "신의 나이 74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였으니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한말의 어려운 정세 가운데서도 권력에 굴하지 않고, 부당하다 여겨지는 일에는 언제나 소신을 다해 저항했던 면암 최역현 선생.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고련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던 그의 기백과 애국애족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반드시 되새겨야 할 귀중한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