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이위종
독립운동가 2018.04.13 조회 23772 0

49_외교를통한_독립운동_이위종 

 

이위종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려 나라를 지켜라"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이위종 선생

 

1896년 초여름, 대한제국의 한 관리가 미국 워싱턴 초대 공사로 발령을 받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영어 한 마디 못하고, 미국 사정에도 밝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여 년 뒤 그의 아들은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등 3개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907년, 그 청년은 네덜란드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유창한 프랑스어로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를 향해 일본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고, 조국의 안타까운 상황을 호소한 것입니다.

이 청년이 바로 고종황제의 헤이그 특사로 유명한 이위종 선생입니다.

 

선생은 주미공사로 부임한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미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이후에는 프랑스와 러시아로 건너가 교육을 받으며 국제적 감각을 익혔습니다.

대한제국에 헌신한 관료이자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남다른 조국애를 품고 자라게 됩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됩니다.

그 때, 선생은 주러시아 공사로 근무하던 아버지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일본 측은 곧장 각국의 공사관들을 폐쇄하였으나, 선생과 그 아버지는 이에 불응하고 현지에 머무르며 비공식적인 외교활동을 지속해나갑니다.

 

미래를 기다리며 외교활동을 이어가던 이위종 선생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로 고종이 헤이그에 파견할 3명의 특사 중 한 명으로 그를 임명했던 것이죠.

이위종 선생은 외교적 독립운동을 이어나가기 위해 기꺼이 특사 임무를 맡습니다.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과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하게 되죠.

 

헤이그에 도착한 세 사람은 한국 대표로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위종 선생은 유창한 언어 실력을 발휘하여, 각국 대표와의 교섭과 기자회견에서 주역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세계 기자단과 현지 여론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허나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결국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이에 특사 일행은 일제의 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선언합니다.

또한 공고시를 영어와 불어로 번역하여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고, 신문을 통해 국제여론에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대한제국의 황제와 국민은 자주독립과 세계 평화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서 '한국을 위한 호소'를 주제로 불어 강연을 펼칩니다.

그의 노력은 외신들의 관심과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성과를 거둡니다.

독립을 위해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던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노력은 주권을 빼앗긴 한국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은 폐위되었고, 통감부에서는 이상설 선생이게는 사형을, 이준, 이위종 선생에게는 종신징역형을 신고하고 체포령을 내립니다.

이후 선생은 러시아지역에서 조국독립의 열망을 품고 끈질긴 항일 독립투쟁을 펼쳐나갔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위종 선생의 공훔을 기려 1962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선생의 활약 덕분에 세계에 한국의 상황 및 일제의 침탈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외교관의 직임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빛나는 외교 독립운동은 우리나라가 국권을 회복하는데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