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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심
독립운동가 2018.04.13 조회 1806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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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심

 

중국 대륙을 넘어 독립을 향하다

모병을 통한 독립운동, 오광심

 

"여러분, 오늘이 마지막 수업입니다."

스물한 살 앳된 얼굴의 여교사가 초등학생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던 시절, 만주의 한 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학교를 그만둔 교사가 향한 곳은 바로 조선혁명군 군수처였습니다.

안정적이었던 직업을 그만두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가의 길을 선택한 여성, 그의 이름은 바로 '오광심' 선생입니다.

 

오광심 선생은 조선혁명군 소속으로 지하연락 활동을 담당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합니다.

또한 그 곳에서 자신의 반려자이자 평생의 동지인 김학규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1940년 경,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오광심 선생은 총사령부에서 사무 및 선전 사업을 담당하게 되죠.

그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군인들에 대한 홍보와 선전을 위한 <광복>이라는 이름의 기관지를 발행합니다.

 

"여자가 없으면 세계를 구성할 수 없으며, 우리 민족을 구성하지 못할 것이다."

오광심 선생은 광복 기관지를 통해 한국 여성의 존귀한 존재성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항일 독립사상과 함께 평등 여권의 실현을 강조하며, 국가와 사회의 임무에 대한 이야기를 이 땅의 여성들에게 알려주고자 노력했습니다.

 

또한 오광심 선생은 교사로 재직한 경험을 살려 청년공작대에서 활동했습니다.

그 곳에서 항일투쟁의 내용을 담은 합창, 연극 및 벽보를 제작하며 선전활동을 이어나갔죠.

이 시기 선생의 활동은 한국광복군 창설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조국, 고향땅, 두고 온 가족을 다시 만납시다!"

이후 모병업무 강화를 위해 광복군 서안 제3지대가 편성되자, 선생은 서안보다 더 전선과 가까운 산둥반도로 가서 모병 및 선전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는 철저하고 세심하게 대원들을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자상하게 보살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1945년, 마침내 조국이 독립을 맞이하자, 선생은 남편 김학규 선생과 상해로 갑니다.

그곳에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그들이 안전하게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입니다.

남은 이들을 위한 활동을 모두 마친 후에야, 그리고 그리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임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임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가는 험난한 과정에서 그가 지어 토로한 노랫말처럼 오광심 선생은 조국독립을 향한 굳건한 의지로 광복의 그날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항일투쟁에 헌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