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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혜
독립운동가 2018.04.13 조회 23877 0

46_궁녀에서_의로운간호사가_되기까지_박자혜 

 

박자혜

 

궁녀에 의로운 간호사가 되기까지

"간호사 독립운동단체, '간우회' 설립자" 박자혜

 

1910년 경술극치.

일제는 '황실령 34호'로 궁내부 소속의 궁인 660여명을 해직시킵니다.

이들 사이에는 어린 시절부터 궁인으로 살아왔던 박자혜 선생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찾아야 했고, 상궁 조하서를 따라 숙명여학교에 입학하여 근대 교육을 받게 됩니다.

 

선생은 교육 끝에 조산부 자격증을 얻어 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서 일하게 됩니다.

당시 의사와 간호부의 80%는 일본인으로, 요직은 모두 그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919년. 만세 운동으로 인해 서울의 각 병원은 부상자들로 넘쳐났습니다.

선생이 근무하던 총독부의원도 마찬가지였죠.

 

총독부의원 간호부 모두를 대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한 주동자

- 박자혜에 대한 일본의 사찰휘보 -

 

박자혜 선생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저항하다 다친 동포들을 치료하면서 민족의 울분을 통감하며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근무를 마친 뒤, 그녀는 간호부들을 옥상에 불러 모아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죠.

그렇게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이필주 목사와 함께 '간우회'를 조직합니다.

 

박자혜 선생은 간우회를 통해 독립만세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각종 유인물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배포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동료들과 함께 일제의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는 동맹파업을 주도하기도 합니다.

더 이상 병원에서 일본인들을 위해 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병원을 떠나게 됩니다.

 

1919년 박자혜 선생은 북경으로 건너가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합니다.

1920년에는 그 곳에서 운명처럼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궁핍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을 떠나 두 아들과 함께 국내로 돌아와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선생은 당시 많은 독립 운동가의 아내들처럼 남편의 독립 활동을 지원하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가정 경제, 자녀 교육, 남편의 독립활동 내조 등이 모두 선생의 몫이었으며, 일본 경찰의 감시와 폭력에도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자혜 선생은 꿋꿋하고 억척스럽게 두 아들을 키우며, 국내에 드나드는 독립 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합니다.

그녀가 지원했던 독립운동가 중에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던 나석주 의사도 있었습니다.

 

1936년에 신채로 선생이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고, 1942년에는 둘째 아들 또한 사망합니다.

조국과 남편, 아들을 잃은 박자혜 선생은 잦은 연행과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1943년 10월, 해방을 2년여 앞두고 가난한 셋방에서 병고로 쓸쓸히 숨을 거두게 됩니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암흑의 시대.

단지,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불굴의 의지로 조국의 독립을 지원한 박자혜 선생.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시대적 소명을 다하며 실질적 모범을 보이신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애국 열사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