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신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넘나들며 활동한 삼남의병대장

영웅정보

김동신
  • 이름

    김동신

  • 성별

    남성

  • 일생

    1871.12.26 ~1933.01.30 .

소개글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넘나들며 활동한 삼남의병대장

영웅 연대기

1906년 3월 26일 홍주(洪州)에서 기병한 민종식(閔宗植)의 부하로 들어가 그 선봉장이 되었다. 김동신은 민종식에게 전라남북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북 무주군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자원암(紫原庵)으로 내려와 이곳에 유진하면서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민종식이 먼저 홍주에서 기병하였지만 그후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김동신은 전라남북도를 잠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해 갔다. 군대해산 후 의병운동이 보다 심화되어 가자 김동신은 전북 정읍군 내장산 백양사(白羊寺)에서 기우만(奇宇萬)·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 부락으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소모하고 군기를 모아 갔다. 양력 9월 10일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순창(淳昌)의 우편 취급소와 경무고문 분파소(警務顧問 分派所)를 습격하여 이곳을 점령한 후 관물을 노획하였다. 김동신의 순창 거의는 이해 9월 15일 고광순의 동복(同福) 순사 주재소 습격과 더불어 군대해산 후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에 있어서의 의병 봉기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었다. 1907년 8월 4일(음)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남원 사장(南原 沙場)에서 일군과 격전하여 적 2명을 사살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8월 11일 고광순 의진과 더불어 응령(鷹嶺)에서 적을 공격할 것을 약속하고 행군하여 구례 연곡사(求禮 燕谷寺)에 당도하니 그 지역은 천혜의 험지로서 군사를 머무르고 군세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군기(軍旗)를 세웠다. 기에는 '머지 않아서 국가를 회복한다'라는 뜻으로 '불원복(不遠復)'이라는 3글자를 썼다. 그리고 6시경에는 8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구례(求禮)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일 군경을 격퇴시킨 후 이곳 군기를 노획하였다. 이즈음 이들이 문수암을 거점으로 하였기 때문에 9월 18일 일군들이 문수암을 불태웠다. 8월 17일 오전에 약 8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함양군(咸陽郡) 좌전(左田)에서 일 군경 20여 명과 격전을 벌여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9월 4일 의병 6백 명을 거느리고 경남 안의군 월성(安義郡 月城)에서 일병 40명을 공격하였고 9월 15일 의병 1백 명을 거느리고 이석용(李錫庸) 의진과 합진하여 전북 용담군 심원사(龍潭郡 深原寺)에서 일병 47명과 종일토록 격전을 벌여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1908년 2월 약 1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북 용담군 구랑(九郞) 일대에서 일병과 교전하여 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전북 무주군 황천면 삼곡리(茂朱郡 篁川面 三谷里)에서 일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3월 6일 스스로 "3남의병대장"이라 칭하고 8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거창군 매학(居昌郡 梅鶴) 일대에서 일병 70여 명과 교전하였다. 이와 같이 전라·경상도 일대에의 종횡무진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활약하던 중 뜻하지 않게 신병이 발병하여 남몰래 고향인 충남 회덕군 탄동면 덕진동(炭洞面 德津洞)에서 치료하다가 대전 경찰서 일경에게 탐지되어 6월 8일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될 때 사령서(辭令書) 2매, 일기장, 통문 28통, 왕복문 38통, 주민에게 낸 명령서 7통, 탐정계서(探偵屆書) 28통, 청원서 11통, 회계서류 10통, 잡서 1봉 등 그간의 그의 활약상을 담은 일체의 기록문서가 일경의 손으로 넘어간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가 체포된 후에도 그의 부하 비장들은 계속해서 전북 무주, 경북 성주(星州), 경남 거창(居昌), 전북 순창(淳昌), 전남 담양(潭陽)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그와 함께 거의하여 선봉장으로서 활약하던 유종환(兪鍾煥)·문태익(文泰翊)·최정근(崔正根)·성문길(成文吉)·차은표(車恩表)·오대근(吳大根)·국인묵(鞠仁默)·임병주(林秉柱) 등을 들 수 있다. 8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내란죄로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다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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