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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유익석 선생
1876년 1월
대궐 문 앞에 엎드려 개상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며 일본과의 수교를 반대했던 인물.
이는 선배 최익현이 목숨을 걸고 행했던,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엎드려 올린 상소와 뜻을 함께 한 것입니다.
일본과 서양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기꺼이 의병을 조직했던 정의로운 유림.
유.인.석. 그와 동지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896년 2월 3일, 영월성 문루.
영월성 자규루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유인석이 <격고팔도열읍>을 강직한 어조로 읽고 있습니다.
유인석의 앞에는 안승우, 김백선 등 조국을 위해 모인 많은 의병들이 함께 있습니다.
이때부터 의병장 유인석은 이소웅, 이강년을 비롯한 3천여 명의 의병들과 힘든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의병은 총을 가진 자가 4백여 명에 불과해 신식 병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비해 전면적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소웅, 이강년을 비롯한 의병들은 죽음을 각오한 채 기습공격을 감행하자,
일본군은 겁을 먹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의병들을 이끌며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던 유인석은,
1896년 8월, 유흥석과 함께 재거의를 모색하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갑니다.
우여곡절 끝에 서간도에 정착한 유인석은 1897년 11월, 고종의 칙령을 받고 귀국하였지만, 국내 사정이 여의치 않자,
"나라가 회복되지 않으면 차라리 평생 요동에서 나그네로 살겠다."라고 결심하며
1898년 2월, 60여명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이들의 집단적인 이주는 경술국치 이후,
만주벌판에서 펼쳐진 독립군 기지 개척 활동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유인석 의병장의 결단이 결국 만주벌판에서 우리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된 셈입니다.
유인석은 독립운동을 위해서라면 세상 어디든 달려가서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것이 국내든 중국이든 러시아든 상관하지 않고 말입니다.
1908년 그는 병들고 늙은 몸을 이끌고 다시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합니다.
1910년 7월 17일, 유인석은 전민족 연합의병조직인 13도의군의 도총재가 되고,
1911년 12월 19일,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 <권업회>의 수총재가 됩니다.
1915년 초봄, 이국땅 중국에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가 강조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죽을힘을 다해야 본국을 회복할 수 있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사투를 벌인 정의로운 조선의 유림!
유인석의 이야기였습니다.